[스크랩] 오마이뉴스에 소개 된 주자천의 `죽쑤며 사는 이야기

2006. 9. 6. 22:08좋은글

'죽사발 나는 삶'으로 죽 쑤며 사는 여자
시인 이은숙, 첫 산문집 <주자천의 죽 쑤며 사는 이야기>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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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미움을 한꺼번에 받고 있는 죽

▲ 시인 이은숙 첫 산문집 <주자천의 죽 쑤며 사는 이야기>
ⓒ 인간사랑
"병문안을 가면서 죽을 포장해서 가는 사람이 많다. 나이에 따라서 선호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먼저 나이부터 묻게 된다. 연세가 높은 분들은 씹히지 않는 것을 권한다. 죽이야 소화 잘되니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다. 젊은 사람은 중병이 아니면 특별하게 제한을 둘 일이 없다.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가 왔다. 전복죽을 주문하는 걸 보니 큰 맘 먹은 게 분명하다. 사실 죽값이 밥값보다 비싸다. 뭔 죽값이 이렇게 비싸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비싼 값을 받으면 그만한 값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63쪽, '개나리꽃이 피듯' 몇 토막


사람들은 흔히 입맛이 통 없어 밥을 먹지 못할 때나, 산후 혹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난 뒤에 죽을 자주 찾는다. 여러 가지 곡물과 채소, 고기 등에 물을 붓고 보글보글 오래 끓여 폭삭 무르익게 만든 죽은 질기고 딱딱한 여느 음식에 비해 누구나 쉬이 먹을 수 있고, 소화 또한 아주 잘 되기 때문이다.

죽은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미움을 한꺼번에 받아왔다. 하지만 죽은 사랑보다는 미움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죽이 병든 사람의 기운을 되살려주고, 이 빠진 노인들의 건강을 챙겨주긴 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이 볼 때에는 풀처럼 희멀겋게 풀어진 죽이 그리 탐탁치 않은 음식쯤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은 서로 뜻이 잘 맞을 때에는 '죽이 척척 맞다'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하지만 어떤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헛다리를 자꾸 짚으면 '죽을 쑨다', '죽을 맛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뼈가 바스라 지도록 심하게 맞았을 때에도 '죽사발 나게 맞았다'라고 하며, 마음이 자주 변하는 사람을 일컬어 "변덕이 죽 끓듯 하다' 라고 내뱉는다.

왜 그럴까. 이는 죽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죽이 맞다'라는 것은 뒤죽박죽 잘 섞인 죽을 뜻하며, '죽을 쑨다'는 어디가 아파 입맛이 없을 때, '죽을 맛이다'는 죽을 먹어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 '죽을 맛' 이다. 게다가 '죽사발 나게 맞았다'는 밥을 먹지 못하고 죽사발을 달고 살아야 할 정도라는 그 말이 아니겠는가.

"간간이 죽도 쑤면서 사는 게 인생 아닐까"

"죽 쑨다고 하면 두 가지를 생각한다. 먼저 뭔가를 망쳤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먹는 죽을 떠올린다. 전혀 실패나 과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간간이 죽도 쑤면서 사는 게 인생 아닐까. 되도록이면 단순하게 살고 싶다" -'책머리에' 몇 토막

지난 2003년 12월, 조병화 시인으로부터 "시정(詩情)이 고르게 흐르고 있어, 잘 읽히며, 이해되며, 이러한 리듬을 타고 시를 읽는 맛과 즐거움을 준다"라는 평가를 받은 첫 시집 <자반 고등어를 굽다>(미래사)를 펴낸 이은숙 시인이 첫 산문집 <주자천의 죽 쑤며 사는 이야기>(인간사랑)를 펴냈다.

이 산문집은 실제 서울시청 뒤 삼성본관 옆에서 '본죽'이라는 죽 전문점을 꾸리며, 매일 '죽을 쑤는 삶'과 '죽사발이 나는 삶'을 살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의 죽과 죽집에 얽힌 여러 가지 인생 이야기가 죽사발에 든 죽처럼 풀어져 있다. 어떤 일을 하다 죽을 쑨 사람에게 따스한 죽 한 그릇이 그 사람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처럼.

'이쁜 떼보' '동동구리무' '꽃가마 속에도 슬픔이 한 가마' '그놈은 멋있었다' '하나님 놀다 가세요' '곰국은 아무나 끓이나' '고등어 대가리' '죽 쑤는 게 더 힘들어요' '지그재그 인생' '아, 다르고 어, 다르고'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는데' '몸뚱이가 재산이여' '죽과 함께 팔아먹은 시' '어머니의 청국장' 등 84편이 그것.

시인 이은숙은 "무엇이든 마음이 담기면 그게 보약"이라고 귀띔한다. 이어 그는 "병문안을 가면서 획일적으로 사들고 가는 주스상자, 그 주스병에도 마음의 테이프(완쾌를 바라는 말 몇 마디)를 붙이면 훨씬 근사하지 않을까"라며, "진정으로 맘 써주는 벗이 있다면 한번쯤 앓아누워 볼 일"(개나리꽃이 피듯)이라고 말한다.

부처님께 시주하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입에게 시주한다

"보살님, 죽 한 그릇 보시하시지요."
"…?"
"돈 말고 밥 좀 주십시오."
"그러지요. 앉으세요."
"춥고 배가 고프네요."

늙수그레한 스님 한 분이 탁발을 왔다. 요즘은 탁발스님이 없는 줄 알고 있는데 가끔 온다. 그러면 아무 말 없이 통에 넣어준다. 진짜네, 가짜네 하지만 상관없다. 부처님한테 시주하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입을 생각한다. 한 끼 고픈 배를 달래주는 것이다. -72쪽, '성불하소서' 몇 토막


▲ 시청 옆에서 죽을 쑤며 사는 여자 이은숙 시인
ⓒ 인간사랑
어느 날, 시인이 운영하는 죽집에 스님 한 분이 찾아온다. 그 스님은 죽집에 들어서자마자 배가 몹시 고프니 돈 대신 죽이나 한 그릇 보시하라고 말한다. 시인은 두말없이 그 스님에게 죽을 한 그릇 대접한다. 그 스님이 진짜 스님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부처님께 시주하는 게 아니라 배고픈 입"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죽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운 뒤 지긋하게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댄 그 스님, 삼십여 분을 그렇게 느긋하게 앉아 있다 천천히 일어서며, 시인에게 "보살님, 성불하세요"란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난 그 스님. 시인은 그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죽집에는 스님만 탁발하러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하러 오기도 한다. 시인은 "술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천 원만 주세요를 입에 달고 있는 젊은이"나, "놀랍게도 말쑥한 숙녀가 구걸을 하러" 온다거나, "허우대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하러 오면 오히려 야단을 쳐서 보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언니!'로 통하는 사회

"요즘은 호칭이 너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남편더러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시(?) 되었다. 식당이나 아니면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다들 언니라고 부른다.

할머니가 젊은 아가씨를 부를 때도 언니, 아저씨도 언니라고 부르는 데 너무 익숙하다. 처음엔 그 언니라 불리는 게 정말 못마땅했다./ 언니!라고 부르면 그건 좀 낫다. 이젠 아예 언니야!라고 반말로 부른다. 이게 도대체 어디식 호칭인지 알 수가 없다." -98~99쪽, '언니를 찾아주세요' 몇 토막


시인은 죽집을 운영하면서 손님들로부터 별의별 희한한 호칭을 얻는다. '언니' 혹은 '아줌마', '여기요', '이봐요', '어이' 등. 하지만 그것까지는 그나마 낫다. 어떤 이는 반찬을 좀 더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반찬종지를 툭 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시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아예 턱으로 가리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어느 날, 자식 또래의 젊은이가 죽집에 찾아와 시인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음식을 시킨다. 그동안 희한한 호칭에 면역이 되다시피 했던 시인은 그 젊은이가 내뱉는 '어머니'라는 소리가 더없이 곱고 예쁘게 들린다. 그때 일행들이 "원래 얘가 그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좋아하세요" 라고 귀띔한다.

그때 문득 시인은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린다. 예전에는 "꼭 내 부모가 아니더라도 친구의 부모님을 부를 때 어머니, 아버지, 그렇게 불렀었"고, "그 부모님들도 내 자식처럼 불러주셨다". 시인은 그런 시절이 그립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언니' '이봐요' 보다 차라리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듣기 좋지 않을까.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는데 죽집에서 못해요?"

"전복죽에 정말 전복 넣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전복죽에 전복을 안 넣으면 뭘 넣어요?"
"요즘 전복이 비싸니까 소라를 쓴다는 대요. 얼마 전 티브이에도 나옵디다."
"그런 일이 있대요?"
"하기사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는데 죽집에서 못해요?"
"전 대통령이 아니잖아요." -150쪽,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는데' 몇 토막


시인 이은숙의 첫 산문집 <주자천의 죽 쑤며 사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갑자기 삶이 푹 퍼진 죽처럼 서글퍼진다. 이 세상에는 제대로 된, 사람을 살리는 죽을 쑤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그야말로 '죽사발 나는 삶', '죽을 맛이 나는 삶'을 사는 희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시인 이은숙은 오늘도 사람을 살리는 삶의 죽을 쑤며 죽처럼 부드러운 사람을 기다린다. 처음 입에 넣으면 아무 맛이 없는 듯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깊은 맛이 새록새록 배어나는 죽맛처럼 정이 깊은 그런 사람, 매일 아등바등해도 죽사발만 나는 그런 삶보다 죽이 척척 잘 맞는 그런 살가운 삶을 사는 사람을 못 견디게 그리워한다.

죽에 담긴 세상살이를 시의 그릇에 담는 시인
시인 이은숙은 누구인가?

▲ 시인 이은숙
ⓒ인간사랑
"시간이 나면 산에 오른다. 나무와 풀과 꽃을 만난다. 서로 다른 나무들과 풀들이 어우러진 숲에서 사계절을 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빛도 달라진다. 멀리서 보는 산과 가까이서 보는 산은 다르다. 사람 사는 것도 계절 바뀌는 산과 같다고 생각한다." -'책머리에서' 몇 토막

'주자천'(朱子川)이라는 아호를 쓰고 있는 시인 이은숙은 1999년 시 '하루살이도 꿈을 꾼다'로 제1회 <서울문예상> 신인상을, 2001년 시 '돌담장' '당집에 눕다'를 <문예비젼>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자반고등어를 굽다>가 있으며, 지금은 인터넷신문 <아이 캔 뉴스>에 '주자천의 죽 쑤며 사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시와 산> <창과 나무들> 동인.
/ 이종찬 기자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 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2006-09-05 18:08
ⓒ 2006 OhmyNews
출처 : 동가식서가숙(東家食 西家宿)
글쓴이 : 아정峨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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