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황진이..진흙 연못의 연(緣)

2009. 4. 11. 17:59좋은글

왜 기생이 되려 하는가
노류장화에 해어화라, 눈밭에 향기를 흩날리는 내한매니,
진흙속의 한송이 연꽃 일타련이니, 죄지어 인간세로 귀양 온 선녀 적선이니
부르는 이름은 곱기도 하지만 꽃같은 얼굴 늙기는 쉽고
인생은 길어 기생살이가 이름처럼 곱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다.
기생이란 천지간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인 것을..


어머니가 죽어간 그 자리에서 거꾸로 살려하니
그 자리가 내 씨앗을 떨어뜨린 자리이니 그 곳에서 꽃피울 수밖에
진흙 연못의 연이 어디 다른 곳으로 가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세상 바깥에서 온몸을 더러운 물에 담그고 천하게 살겠지만
내 생은 길고 짧거나 천하고 귀한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 자유로울 것이오.

관기는 관아에서 정해주는 사내를 극진히 모셔야하고
어머니가 되라면 어머니가 되고, 딸이 되라면 딸이 되어야 하고
술잔이 되라면 술잔이 되어야 하고
먼저 묻기 전에는 결코 입을 열어서는 안되며
내 이름이 무엇이며 내 친족이 어찌되는가를 잊어야 한다 배웠지만
권세나 관습에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소,

사내들 특히 사대부라 칭하는 사내들은 입으로는 공맹이 어떻느니
손으로는 두보를 넘어서며 이백을 발 아래 둔다고 실력을 부풀리어 자랑하면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평생을 진사네 생원입네 지내지요.
그들은 내가 누군이가를 아는 것보다 나란 관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에 관심을 둔다오.

내가 공부를 하고 그들과 시를 논하는 까닭은
재주를 뽐내어 대삼작 노리개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저 시업(詩業)의 위대함과 *시마(詩魔)의 지독함을 보임으로써
나만의 자리를 만들고 섶사냥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나만의 굴에서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오.

당음(唐音)과 삼체시(三體詩> 당시고취(唐詩鼓吹)를 논하며
그 뜻과 흥이 뛰어난 시를 들려 달라고 하지요.
뜻밖의 청을 받은 사내들이 물러서면 더욱 그들을 궁지로 몰았소.
나를 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가면을 벗게 만들었다오.

밤을 꼬박 새워 서책을 읽고 나면 밥으로도 메울 수 없던 허탈한 기운이 어느새 사라지고
서책을 통하면 세상 만물 모두가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고
비로소 우리의 삶이 학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희미하게나 깨달은 겁니다.
배움이 조금씩 깊어갈수록 이 배움을 함께 나눌 지음이 그리웠으나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모로 젊은 총각이 상상병으로 죽어 나가고
태생을 숨기고 사대부가에서 자라난 진사의 얼녀가
명월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방에서 자칭타칭 풍류호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으니
그 목적은 오로지 하나 황진이를 꺾어보겠다는 것이었으나..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잣나무 배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누가 먼저 건넜느냐 사람들이 묻는다면
문과 무를 모두 갖춘 부귀한 사람이라 하리


평생 세 부류의 사내들에게 잣나무배에 오르기를 허락하였으니
먼저 송도의 거상들로
세상에 돈처럼 더럽고 야비하며 예측할 수 없고 큰 힘을 지닌 것이 어디 있게소.
말이 좋아 거상이지 누구에게도 밝히기 힘든 속 깊은 이야기를 의논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들은 돈이 아니라 황진이를 믿는다 하였으니 사람에 대한 믿음은 장사치는 물론이고
도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관문이지 않겠소.
그들이 내게 주는 배려는 당장은 손해겠지만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일을 꾸민 사람치고 1년을 넘기는 이가 없으니
편법을 쓰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행할 때에만 뒤탈이 없는 법이거늘
그들은 믿음으로 맺어진 나의 지음이었소.

다음이 나보다 음률에 능한 사내를 기꺼이 대접하였소.
문둥병자이거나 빌어먹는 거렁뱅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소.
득음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알기에 먼저 달려가서 손을 내밀었소.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며
혼인도 않고 자식도 없이 가야금에 의지하면 보낸 가야금의 명수인 악공 엄수(嚴守)
그는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것은 집착을 키우는 일이며
집착이 자라면 편히 죽음을 맞을 수 없다며
글 한 자 모르지만 가히 임류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오.

목소리의 아름다움으로 견주자면 선전관 이사종을 넘어서는 이가 드물 것이요.
그 목소리는 붉은꽃 흰꽃이 봄바람에 다투고 천상의 음악이 비단 장막에 엉기는 듯 하였소.

마지막으로 시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 사내라면 버선발로 마중을 나갔지요.
조선의 사대부치고 시 한 수 짓지 못하는 이가 없지만
만당의 격에 어울리는 시는 지극히 드물었는데
시의(詩意)를 아름답고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
수도 없이 퇴고를 거듭한 양곡 소세양은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할 따름이오.
*시미(詩謎)놀이에서 나를 이긴 무사는 그가 유일하지오.


*시마(詩魔) : 어느 순간 시인의 속으로 들어와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만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으로 이 귀신이 한번 붙고 나면 그 사람은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되며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시미(詩謎)놀이 : 옛 시인의 시집에서 한 구절을 따다가 그 가운데 안자(眼字)가 되는
한 글자를 지워버리고 원래 있던 글자 외에 그럴 듯한 네 글자를 늘어 놓아 제 글자를 찾아
맞추는 놀이를 말한다.


출처 : 맛자랑 홍미가(공항에서 10분거리)
글쓴이 : 崑玉 홍은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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