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어린이문학으로 찾아가는 선의 세계

2009. 4. 4. 19:49좋은글

어린이문학으로 찾아가는 선(禪)  

詩 전문지 문학 선에 실린 글  

『어린이문학으로 찾아가는 선의 세계』
                                                  소야 신천희
Ⅰ. 여는 글
나는 시와 동시를 다른 갈래로 나누고 싶지 않다. 시는 주 독자가 어른이고 동시는 주 독자가 어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어린이들만을 대상으로 동시를 쓰는 작가들이 많다.
나는 그들과 분명히 생각을 달리 하고 싶다. 시를 모르면 동시를 쓸 수 없다. 동시도 먼저 시로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는 어른 독자에 어린이 독자를 추가한 시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전면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읽었을 땐 어린이의 눈 높이에 닿고 어른이 읽었을 땐 어른의 눈 높이에 닿을 수 있어야 한다. 즉 부모가 같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게 어른들을 위한 배려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만이 빠르게 변하는 어린이들의 정신세계를 따라잡을 수 있다.
시는 똥이다. 똥이나 시나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쏟아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오래 묵힐수록 똥다운 똥이 나오듯 오래 숙성시킬수록 시다운 시가 나오는 법이다.
가끔가다가 천재시인들을 만날 때면 나는 존경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동인지 원고를 낼 때나 합평회를 할 때 "어제저녁에 몇 편 썼지"하고 태연하게 말하는 천재시인들 말이다. 시를 밀린 일기 쓰듯 하루저녁에 금방 쓰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시인인가?
조지훈이 "승무"를 쓰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가슴이 닳도록 끓이고 끓인 끝에 그런 좋은 시가 탄생되지 않았을까?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빚는 것이다. 달콤한 속이 감쪽같이 숨겨진 송편처럼 빚는 것이다. 반죽을 하고 주무르며 '이 떡을 먹는 사람에게 어떤 맛을 느끼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속을 넣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먹는 이로 하여금 '아! 이 맛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도 하고, 이 맛일까? 저 맛일까? 하는 상상의 여백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동시다.

1.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마음의 본성을 깨쳐서 마음에 자유를 얻는 공부다. 마음의 본성을 깨친다는 것은 본래면목을 되찾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본디 지니고 있던 심성으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똑같이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본성을 중생을 구제하는데 썼기에 부처가 되었고 중생들은 나를 이롭게 하는데 썼기 때문에 중생이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닦음의 종교다. 욕의 작용에 사로잡혀있는 마음을 닦아서 너나 없이 부처가 되자는 것이 불교의 근본교리다.
부처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선에는 특별히 정해진 길이 없다. 옛 조사들의 수행방법을 좇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나만의 길을 선택했다. 어린이문학을 통하여 선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선방에서 칼날같이 깨어 정진하는 선객들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내려놓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디서 수행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선이란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어린이문학을 통하여 찾아가는 선의 세계는 알기 쉽고 단순하다. 선사들은 선시를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였지만 나는 동시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선을 전달하고자 한다. 전달한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스스로 깨닫게 도와준다는 뜻이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선지식들의 깨달음인 오도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잊고 있던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을 말한다.      

1) 염화시중의 미소      
선의 세계는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다. 개구즉착이라, 말하는 순간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기에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영산회상 대법회에서 설법을 하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갑자기 연꽃 한 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스승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중은 당황했다. 그 중에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은 가섭존자에게 전해졌다. 깨달음은 이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즉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부처님은/파리들이 자꾸 달려들어/귀찮게 하는데도/바보같이/벙시레 웃고만 있다//친구들이/파리처럼 달려들어/못 살게 굴 때/나도 저렇게/벙시레 웃고 있으면/ 부처가 될까

자작 시 「부처님」전문

선으로 가기 위한 정진은 끝없는 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파리가 저렇게 귀찮게 하는데 부처님은 왜 웃고만 있을까? 여기서는 "왜 웃고만 있을까?" 이것이 화두다.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불상은 부처님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은 무한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파리 하나쯤 쫓아버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냥 웃고만 있을까? 그 웃음은 염화시중의 미소다. 중생들이 이심전심으로 부처님의 뜻을 전해들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파리가 중생한테 달려들어 귀찮게 했다면 벌써 파리채에 맞아 운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잔잔한 미소 하나로 중생들의 잘못된 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무한한 자비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동시는 어린이들에게 남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과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폭력을 사용하는 나이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에까지 일진회라는 폭력조직이 숨어들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친구를 따돌림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식되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어린이들이 이 동시를 읽고 남을 괴롭히는 파리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묵묵히 참을 줄 아는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2) 나는 누구인가
운암선사가 차를 달이고 있는데 한 스님이 와서 물었다.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는가. 차를 달이는 중이지."
운암선사가 뻔한 일을 왜 묻느냐는 투로 말했다.
"혹시 누구를 주려고 달이십니까?"
"한 사람이 달라고 해서 달인다."
"그럼 그 사람에게 달이라고 하지 왜 손수 달이십니까?"
스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운암선사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내 속에 있다네."

내 속에 있는 이놈은 과연 누구인가? 나를 울고 웃고 떠들게 만드는 이놈은 누구인가?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다니듯이 나를 몰고 다니는 이놈은 누구인가? 이것도 정진하는 화두 중에 하나다.
막연하게 볼 때 나라는 놈은 분명히 이 모습의 나인데 깊이 관해 보면 나를 맘대로 부리는 또 다른 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놈이 과연 누구인가"를 관해서 참 나를 찾아야 한다.
또한 부모가 나를 낳았지만 부모에게 잉태되기 전에 나는 누구였으며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끝없는 의심 덩어리를 물고 늘어져 그것을 타파해야 선으로 갈 수 있다.    

거울을 보는데/나를 많이/닮은 아이가 나타났다//나는 오른쪽/볼에 점이 있는데/그 애는 왼쪽/볼에 점이 있었다//세상에/가짜가 판친다더니/나도 가짜가 있었다
*짝퉁 : 모조품

자작 시「짝퉁」전문

평소에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냥 내 모습인 줄 알고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내 모습이 정 반대의 모습으로 비친다는 걸 알았다. 여태까지 알고 있던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 가짜였다. 결국 나 자신에게 내가 속은 것이다.
이 동시는 어린이들에게 거울을 보듯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거울을 보며 나에게 속았듯이 자기 자신에게 속았던 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 속지 말아야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속일 수 없다. 이 동시를 읽은 어린이들이 가짜인 나를 몰아내고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밝고 곧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3)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어느 날 승상 최윤이 동사선사를 따라 법당에 들어갔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 한 마리가 부처님 머리 위에 똥을 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최윤이 동사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저 참새에게도 불성이 있겠지요?"
"암, 있지. 있고 말고."
"아니 불성이 있다면 어찌 부처님 머리 위에 똥을 쌀 수가 있답니까?"
이에 동사선사가 대답했다.
"만약 불성이 없다면 그 위에 똥을 쌀 수가 있겠소?"
부처님은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다.

꾀죄죄한/강아지 한 마리가//골목길을/돌아다니고 있습니다//자기는/버림을 당했지만//주인을/차마 버릴 수 없어//살던 집을/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자작 시「사람을 찾습니다」전문

버려진 강아지에 대한 방송을 보았다. 골목길을 누비고 있는 강아지의 모습이 마치 예전에 살던 집을 찾으려고 헤매는 모습으로 보였다. 주인은 강아지를 버렸지만 강아지는 끝까지 주인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흔히 속된말로 "개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주인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강아지야말로 사람보다 심성이 더 나은 게 아닐까? 어쩌면 강아지는 "개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강아지를 버리는 것은 어른들이다. 어린이들의 심성으로는 절대로 강아지를 버리지 못한다. 어린이들이 이 동시를 읽으면 강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어른들에게 강아지는 집을 지키는 파수꾼일지 몰라도 어린이들에게 강아지는 친구다. 이 동시를 읽고 어린이들은 다시 한 번 버려진 강아지를 떠올리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4) 그것 마저 놓아버려라
엄존자라는 수행자가 조주선사에게 한 말씀 여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손에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놓아버리게나."
조주선사의 대답에 의아해진 엄존자가 다시 물었다.
"모든 것을 다 버렸는데 도대체 무엇을 더 버리란 말입니까?"
그러자 조주선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그것마저 놓아버리게나."
이처럼 버린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게 공의 세계다. 중생이 부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걸림돌이 되는 것 중에 하나가 탐욕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의 작용에 눈이 멀어 중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만큼의 땅에/고만큼의 깊이로/뿌리를 내린 풀꽃들은/더 이상/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달님이/밤새도록 깎아 놓은/눈물  빛 보석도/내 것이 아니라며/살며시 내려놓습니다

자작 시「풀꽃」전문

풀꽃들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땅에 뿌리를 내릴 뿐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풀잎에 댕그라니 맺혀있는 보석처럼 영롱한 이슬도 자기 것이 아니라며 내려놓는다. 연잎에 빗방울이 차면 스스로 비우듯이 차면 비우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순리를 모르고 역행한다. 무조건 채우려고만 들지 비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비우지 않고 채울 수 있는 그릇이 어디 있는가!
채우는 것도 자기의 분수에 맞는 그릇에 자기의 것으로만 채운다면 탓할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큰그릇에 남의 것까지 빼앗아 채우려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비운다는 것도 비운다고 하면 이미 비우는 것이 아니다. 비운다는 생각 그 자체까지 내려놓을 수 있어야 선의 세계에 들어 설 수 있다.  
어린이들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의 것을 곧잘 탐낸다. 그것은 어른들이 갖는 탐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어린이들이 이 동시를 읽고 자기의 것에 만족하고 남의 것을 탐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5) 초목의 법문은 누가 듣는가
제자 동산이 운암선사에게 물었다.
초목의 법문은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
"초목의 법문은 초목이 듣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산이 다시 물었다.
"그럼 스님 역시 초목의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까?"
"내가 들었다면 너는 나의 법문을 아예 듣지 못할 것이다."
이에 동산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저는 스님의 법문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운암선사가 심하게 꾸짖듯이 말했다.
"사람의 법문도 듣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초목의 법문을 듣겠다고 난리더냐!"
이 말 한 마디에 동산이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다. 수행자들에게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어떤 소리든 설법 아닌 것이 없다.

조용하던/산이 떠들썩하다//새소리 물소리/새싹들의 만세소리//겨울을/물리친 봄 산에는//새로운/세상을 만드느라고//밤낮없이/장터처럼 시끄럽다

자작 시「봄 산은 시끄럽다」전문

봄이 되면 겨우내 조용하던 산이 시끄러워진다. 어디론가 떠났던 새들이 돌아와 노래하고,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폭포가 녹아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나무와 풀들이 앞다투어 싹을 틔우느라고 끙끙대는 소리 또한 요란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도 한몫을 차지한다.
자연의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고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리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찾아내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리는 마음을 비우고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다.
어린이를 자연과 가깝게 할 수 있도록 키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의 인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연이 큰 역할을 한다. 깜깜한 밤에 계곡 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물소리 풀벌레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그 소리를 어떻게 들었느냐고 물어보면 거의가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대답한다. 그것이 곧 설법으로 들었음을 증명한다. 이 동시를 읽은 어린이들이 조금 더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연에게 다가가서 자연의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6)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아라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라. 천길 벼랑에 한발을 내 딛는다는 것은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다. 벼랑에 매달려 있다면 그 손을 놓아버려야 그 자리에서 살 길이 생기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크게 한 번 죽어야 크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마음속에 들어 있는 참 나를 찾는 것에 삶과 죽음의 일대사가 달려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설산에서 고행을 하셨듯이 이미 생과 사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집이 없어/추위에 얼어죽은/새를 보았습니다//양지바른 언덕에/고이 묻어 주었지만//눈물이/꽁꽁 얼어붙은 눈망울은/가슴에 남아//끝끝내/묻히지 않았습니다

자작 시「떠돌이 새」전문

생각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춥던 날 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추워서 얼어죽은 새! 왜 내 눈에는 처연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보였을까? 눈을 좋아하면 얼어죽을 각오를 하라고 했다. 벼랑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는 것처럼 공부해도 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바람에 날리는 재와 같다. 이 새는 얼어죽을까 두려워 둥지 속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무엇인가 행하려다가 죽었으리라. 다시 푸른 잎을 보게 될 것이니 단풍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더 크게 살기 위해 몸 바꾸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2. 생활 속에서의 선
선의 세계는 수행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인들도 생활 속에서 선의 세계를 탐구해야한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과 나, 너와 내가 둘이 아니듯이 세간과 출세간 또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수행자보다는 순간순간 자신의 바른 품성을 일깨우며 일상을 지어 가는 세인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극락과 지옥도 바로 생활 속에 있다. 새 신을 신고 새 옷을 쫙 빼 입고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설 때는 극락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자동차가 흙탕물을 첨벙 튀겨 버려놓으면 그때부터가 바로 지옥이다. 지옥도 극락도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의 선은 곧 지혜로 이어진다. 욕심을 줄이는 것, 마음을 낮추는 것, 소유를 줄이는 것, 남에게 배려하는 것, 참는 것 등 알고는 있지만 묵과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 실천하는 것이 바로 생활 속의 선이다.

1) 마음을 낮추자
수행자의 기본이 하심이다. 마음을 낮추고 낮추는 것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된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나라는 상을 버리는 것이다. 자연과 나, 너와 내가 하나이기에 나가 따로 없는데 어떻게 내세울 수 있겠는가?
"나" 라는 아집이 없어지면 무아가 되고, 나라는 것을 고립시키거나 대립시키지 않으니 자유자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앞의 자기 위상에 매여서 마음을 낮추지 못한다.
마음을 낮추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인사를 한다든지 음식점에 갔을 때 같이 간 분들에게 물을 따라주는 것, 숟가락 젓가락을 놓아주는 것, 신을 신기 편하게 가지런히 돌려놓아 주는 것 등 사소한 것부터 실천해야 하심을 이룰 수 있다.    

무심코/다락방에 올라가는데//갑자기 눈앞에/번갯불이 번쩍했다//높이 오를수록/머리를 숙이는 거라며//문틀이/내 머리를 쾅 때렸다

자작 시「꿀밤 맞은 날」전문

2) 바르게 살자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이를 거스르며 살게 되면 사는 게 어렵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사생활이 복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명쾌하다. 바른 이치대로만 살면 세상일로 시비할 건덕지도 없다.
바르게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행하지 못하는 게 우리네 일상사다. 욕망에 휩싸이고 자기의 이익만을 좇는 잘못 된 마음 때문이다.
욕망을 털어 버리면 모든 게 환해진다. 모든 나쁜 짓들도 결국 욕망을 위해 저지른다. 나쁜 짓이니까 몰래 해야하고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양심이 가리키는 대로 바르게 살면 어려운 법이 없다.

놀이터에서/꼬깃꼬깃한 천 원짜리/한 장을 주웠습니다//아무도/보는 사람이 없어/군것질로 까먹었습니다//그 뒤부터/친구들 얼굴을/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놀이터에 나가기 싫어졌습니다

자작 시「양심일기」전문

3)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수행자들은 자기를 음해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역행보살이라 부르며 오히려 고마워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공부를 할 화두를 내려 주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오죽하면 세살 먹은 아기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했겠는가.
닦으면 닦을 수록 더러워지는 게 걸레다. 그렇지만 걸레가 더러워지는 만큼 깨끗해지는 게 있다. 결국 걸레는 자신을 더럽히면서 남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일에 남보다 먼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지만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게 걸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걸레를 통하여 희생 없는 봉사는 있을 수 없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대청소를 하는데/누가/살짝방귀를 뀌었다//서로 손가락질하며/다투기에/내가 뀌었다고 자수를 했다//누군지 몰라도/마음이 빨개졌을 거다//남을/깨끗하게 해준 만큼/더러워지는 걸레//오늘은 내게/고마운 선생님이 되었다

자작 시「걸레」전문

4) 약속을 지키자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거짓말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약속이다. 약속은 자기 자신과 하기도 하고 남하고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먹듯이 쉽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약속이 많다. 지키지 않을 약속은 애당초 약속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지켜질 때 그것이 약속인 것이다. 약속은 자신의 신뢰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다시는/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엄마와 손가락 걸던 날//밥 먹고/오줌누고//밥 먹고/똥누고//밥 먹고/잠만 잤습니다//오늘은/착한 일 한 것 없지만/나쁜 짓 한 것도 없습니다

자작 시「약속」전문

5) 맑은 거울에는 흔적이 없다.
깨끗한 거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먼지가 두껍게 앉으면 사물을 비추는 힘이 줄게된다. 그러나 먼지를 깨끗이 털어 내면 다시 이전처럼 모든 것을 비추게 된다.
마음은 바로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번뇌의 구름을 걷어내면 자기의 본성을 찾을 수 있다. 깨끗하게 닦은 거울을 보면 기분이 상쾌하듯이 깨끗하게 닦인 마음은 향기롭다.
죽이는 것, 도둑질하는 것, 음란한 것, 거짓말하는 것은 모두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어나는 곳을 비우고 닦으면 절로 향기로워지리라.

법당에서/염불을 하던 스님이/방귀를 뀌었다//목탁소리에 섞여/들리지도 않았는데//부처님은/벌써 알고/빙그레 웃고 있다//법당을 가득 채운/향기로운 냄새//마음 맑은/스님의 방귀는/뒤가 구리지 않다

자작 시「헌향」전문

6) 자신을 돌아보자
시계의 초침에 쫓기며 사는 현대인들은 자신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자기를 잊고 산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을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의 생을 살려면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잘못한 일은 없는지 돌아보며 반성하고 내일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아를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곧 허무하게 세월만 까먹고 무의미한 생을 사는 것이다.  

학교 가는 길에/파리 한 마리가 계속/따라왔습니다//무슨 말만 하면/입을 때릴 듯이 달려듭니다//오늘/이 안 닦은 걸/귀신같이 알아차렸나 봅니다//파리를 잡으려다 그만/내 뺨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자작 시「후회」전문

바람이/법당 처마 끝에 매달린/풍경을 흔듭니다//기분이 좋을 때는/댕그랑 댕그랑 웃는 소리로//화가 나면/땡그랑 땡그랑 성난 소리로//절 밥을 얻어먹고/절에 사는 바람이//부처님 말도 안 듣고/제 맘대로 풍경을 흔듭니다

자작 시「풍경소리」전문

Ⅱ. 닫는 글
어린이문학 작품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흉내내고 어린이들의 언어로 쓴다고 해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닦고 닦아 동심을 되찾아야한다. 내 마음이 동심에 가 닿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어린이문학 작품을 잉태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를 쓴다는 것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수행자가 언제 어디서건 화두를 내려놓지 않듯이 시인도 언제 어디에서나 글감을 내려놓지 말아야한다. 동시 한 편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작은 씨앗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죽어 있는 것에서 살아있는 모습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보통사람보다 더 큰 호기심을 품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시인이다.
어린이문학으로 선을 찾아간다는 것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가장 쉬운 글로 가장 심오한 철학을 담아내는 것이 어린이문학이다. 오랜 담금질 끝에 탄생한 작품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텅텅 북소리를 울려줄 수 있다면 깨달음을 얻은 선사가 읊조리는 오도송과 다를 게 뭐 있으랴!

   
출처 : 중얼중얼
글쓴이 : 땡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