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황진이의 삶과 사랑과 시

2009. 4. 11. 20:49좋은글

황진이의 삶과 사랑과 시



 




  개성 開城은 ·개경 開京 송악 松嶽 · 송도 松都 · 중경 中京 · 황도 皇都 · 왕경 王京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이 중 개경 못지않게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 송악· 송도· 송경이다. 이는 개경 바로 뒤에 있는 산이라고 하는 송악산에서 나온 것이다.
  송악산의 본래 이름은 부소산이다.
  그런데 신라의 풍수가였던 팔원이라는 사람이 부소산의 형세를 보고 태조 왕건의 4대조인 강충을 찾아와 부소군을 부소산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기고 헐벗은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산의 암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강충은 풍수가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송악산이라는 명칭이나 개경을 흔히 송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자연조건이 풍수적 사고와 쉽게 결합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의식에 풍수 지리적 사고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란 개성의 세 가지 뛰어난 존재를 말하며 이는 화담 서경덕 · 황진이 · 박연폭포이다.



小栢舟 소백주 ㅣ  잣나무 배
                                                              황진이

汎彼中流小柏舟   범피중류소백주 ㅣ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幾年閑繫碧波頭   기년한계벽파두 ㅣ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後人若問誰先渡   후인약문수선도 ㅣ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文武兼全萬戶侯   문무겸전만호후 ㅣ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은 시로 보아진다.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一派長川噴壑壟   일파장천분학롱  ㅣ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水叢叢   용추백인수총총  ㅣ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ㅣ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ㅣ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ㅣ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용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ㅣ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ㅣ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ㅣ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相思夢 상사몽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ㅣ 그립고 그리운 임 꿈에서나 만나는 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ㅣ 내가 임 찾아 나설 때 임도 정녕 딴 길로 날 찾아 나서는지.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ㅣ 다음엘랑 꿈길로 떠날 때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ㅣ 같은 시각 같은 길 떠나 중간에서 보고지고.


황진이가 엮은 상사몽이라는 詩이다.
꿈길에도 갈래가 있어 서로 어긋났다거나, 같은 시간 같은 길을 함께 나서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또한 그 간절함을 강화시키고 있다.
구어를 섞은 소박한 표현 속에 임을 향한 애절하고 간절한 그리움이 그대로 담겨 있다.



松嶽山古寺  송악산 옛절
                                                            황진이

古寺蕭然傍御강  고사소연방어강  ㅣ  개울 곁 옛 절 쓸쓸도 한데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ㅣ  석양의 喬木(교목)은 나의 시름 더하네요.

烟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ㅣ  차가운 안개는 스님 꿈 흔들고
歲月觴嶸破塔頭  세월상영파탑두  ㅣ  깨어진 탑머리엔 세월이 흘렀어요.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ㅣ  봉황은 돌아가고 참새만 날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ㅣ  두견화 피었는데 소와 양만 치네요.

神嵩憶得繁華夢  신숭억득번화몽  ㅣ  繁華(번화)했던 지난날 되새기지만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ㅣ  봄이 가을철 같은 줄 어찌 뜻했으리요.



松都懷古之歌  송도회고의 노래

五白年都邑地  匹馬歸來兮 오백년도읍지 필마귀래혜 ㅣ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山川依舊 人傑何所之兮 산천의구 인걸하소지혜 ㅣ 산천은 의구커늘 인걸은 어데 간고
己矣哉 故國興亡 間之何爲兮 기의재 고국흥망 간지하위혜ㅣ두어라 고국흥망을 일러무삼하리오




소세양 蘇世讓 (1486~1562 - 황진이 보다 34세가 많음)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이다.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가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옵고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판서 소세양이 소시小時에 여색女色에 대해 강장剛腸하기로 자처하여 늘 친구들에게 장담하여 말하기를 ‘여색에 혹惑함은 남자가 아니다’라고 해왔다. 듣건대 개성에 절창 진이가 있다 하나 만일 나 같으면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그리고도 추호도 미련을 안 갖겠다고 했다.

그러나 진이와 만나 30일을 살더니 그 마지막 되는 날 진이가 작별을 서글피 여겨 남루南樓에 올라가 주연酒宴을 베풀고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이에 소판서가 ‘吾其非人哉 爲之更留 ’ 라고 하여 자기의 장담을 스스로 탄하면서 마음이 동하여 다시 머물렀다.

소세양은 윤임과 더불어 여러 상소를 통해 정쟁을 하다가 결국 향리로 물러난 기록이 중종실록에 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사람됨과 40세 전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황진이의 미색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조선조 명문장가 소세양이 7살 때 지은 한시로 신동이라 불리었었다.


新月詩 신월시

誰※斷蟾宮桂  수촉단섬궁계  ㅣ  누가 달 속의 계수나무를 꺾어
裁成玉女梳     재성옥녀소     ㅣ  여인의 빗같은 저 달을 만들었나.

銀河一別後     은하일별후     ㅣ  칠석날 은하수에서 헤어진 뒤
愁亂擲空虛     수란척공허     ㅣ  시름에 겨워 저 하늘에 던져 있다네.



소세양 蘇世讓 1486∼1562 <성종 17∼명종 17>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진주(晉州).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뒤에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明)나라 사신을 맞았고, 뒤에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고,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으나, 명종의 즉위 뒤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 사직하고 익산(益山)에 은퇴하였다.
문명이 높고 율시에 뛰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



송도삼절 황진이



속세를 멀리하고 성거산 화담에 집 짓고 도통하는 서경덕 선생을 유혹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일생 동안 흠모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송도삼절로 박연폭포(절승), 서경덕(절윤), 황진이(절색)를 자칭하였던 황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고 하며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황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황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 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황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 등이 있다.

성격이 활달하고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그녀는 30년간 면벽한 채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도로-아미타불(도로-阿彌陀佛)이 된 것이다.

 


황진이의 출생과 기녀妓女가 된 이야기



본명이 진이요, 별명이 진랑이며 기명이 명월인 황진이는 중종때 송도의 이름 높은 명기로서 출생에서부터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의 부친인 황진사가 길을 가던 도중 병부교 아래 맑은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름다운 처녀인 진현금에게 물을 청하고 서로 나누어 마실 때 마주치던 눈길이 인연이 되고 한 쪽박의 물이 합한주가 되어 당대의 절세가인 황진이를 낳았다고 하는 '황진사 서녀'라는 설과 '장님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황진이의 확실한 생몰 년대는 미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종(1506∼1544)대와 명종(1544∼1567)대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 사적 인물 중 화담 서경덕(1489∼1544)과 백호 임제(1549∼1587)의 작품상의 연대 배경으로 볼 때 절정의 기녀 생활은 명종 대까지로 보나 출신과 기녀 생활은 중종 대이므로 중종조 사람으로 생각된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이유에는 전설이 많은데, 그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일거일동이 예절바름에 감탄해서 연정을 품었던 이웃에 사는 '홍윤보'라는 총각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같은 이웃에서 자라온 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아 갔으나 커서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그녀는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자꾸 멀어져 갔다.
진이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기회도 영영 오지 않았다.
마침내 상사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안타까움을 하소연도 못한 채 아지랑이가 운무처럼 내리는 이른 봄 어느 날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진이의 문 앞에 이르러선 움직이지 않아 열다섯 앳된 처녀가 된 진이가 평소에 즐겨 입던 속적삼과 꽃신을 주어 운구를 덮게 하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의 진이는 항상 마음이 괴로웠고, 날이면 날마다 자기를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다가 죽어간 넋을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미모로 인하여 또 다른 총각을 죽일까 염려하여 호화롭고 귀염 받는 생활의 행복을 버리고
스스로 명월이라 하며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설과 또한 자신이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황진이의 사랑이야기



38세라는 짧은 일생을 불처럼 뜨겁게 태우며 살다 간 황진이는 세상의 풍류남아와 영웅호걸은 원근을 불문하고 모두가 자기의 임이요, 사랑이라고 했다.
30년을 두고 면벽참선한 지족암의 만석선사를 파계시킨 일, 여색에 지조를 뽐내던 벽계수 이창곤을 달밤에 만월대로 유혹하여 그의 자존심을 한 수의 시조로 여지없이 무너뜨린 일, 한양에서 내려온 양곡 소세양과 더불어 생갑사 치맛자락을 끌고 천수원 허물어진 누대 위에서 훗딱 꿈결같이 지나버린 30일의 너무나 짧은 사랑의 아쉬움에 한 시라도 더 붙들고 싶어 했던 그 뜨거운 밤과 자기 곁을 떠난 후 영영 찾아오지 않는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리워하고 다시 보고 싶어 독수공방의 서러움을 안고 베갯머리 적셨던 그 긴 밤 하며, 명문 재상가의 이생도령과 함께 산 좋고 물 좋은 명산대천을 찾아 금강산에서 시작하였다가 중도에 헤어지고 혼자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시절…
다시 반겨주는 이 없는 송도 땅으로 돌아와 지난날의 남가일몽을 생각하며 허무감을 씹으면서 아아 부귀영화도 싫을세라… 청춘도 사랑도 덧없어라…한숨지었던 여인 황진이. 선전관이었던 명창 이사종과의 6년 동안의 동거생활. 이 때 황진이는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아낙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지아비 섬기며 행복을 찾는 그런 여자로서의 운명을 다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송도3절(松都三絶)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조식(曺植) ·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 · 박순(朴淳) · 민순(閔純) · 박지화(朴枝華) ·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 · 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는 한평생 서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늘 거문고와 녹주를 가지고 화담이 사는 초당에 가서 즐기다가 가곤 하였다.

하루 이틀 만남이 깊어짐에 따라 화담과 황진이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정이 이성으로서의 정으로 변해 갔지만 도덕이 높은 화담은 글을 배우러 오는 그녀를 허심탄회하게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 역시 스승으로서의 존경을 넘어서는 마음의 흔들림을 붙잡으려고 몹시 고심했을 것이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임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 예어 가는고.


'자신의 뜻'을 변함없는 '청산'에, '자꾸만 변하는 임의 정'을 '녹수'에 비유한 진이의 심정을 읊은 시조이다.
'청산(진이)'은 기다리고 있으나 '녹수(서화담을 비롯하여 부운거사, 이석, 소양곡)'는 왜 말없이 흘러만 가는고. 사랑을 기다리면서 보내고 참으면서 후회하는 토속적 집념성이 흐르고 있으며 아마도 그녀의 앞을 떠나간 임들은 모두가 이 녹수처럼 울고 떠났을 것이다.

이런 감정의 갈등 속에서 진이가 화담을 찾는 날이 뜸해지자 서경덕은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을 것이다.
밤은 깊고 적막한데 낙엽이 구르는 소리에 놀라 영창을 열고 혹시나 그녀가 올까 기다리고 있는 화담 자신의 모습에 고소를 머금으며 다시 문을 닫고 불은 껐으나 잠이 오지 않아,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기다려지는 심정을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 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그렇게 고고한 화담도 인간인지라 사랑에 대한 순결하고 겸허한 인품이 솔직히 나타나 있고, 그의 고독한 심정이 눈물겹도록 여실히 나타나 있다.
산마루에 잎이 지고 낙엽이 떨어질 때는 독수공방의 외로움이 더욱 적적하고 자기 곁을 떠난 님(진이)을 찾는 담백한 정이 넘치는 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는 모든 남성을 자기에게 굴복시키고자 하였으나 벽계수의 근엄함을 쉽게 꺾은 마음 뒤에 오는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었다.
믿음직한 한 남자의 가슴에 안겨 지아비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을 꾸미는 평범한 아낙네의 생활을 갖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남달리 다정다감한 그녀였기에 텅 빈 가슴의 허전함은 그녀에게 수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왔으리라.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찾아오지 않는 님을 서로 기다리는 심사를 담은 이 두 시조를 통하여 서화담과 황진이가 서로 떨어진 처소에서 낙엽 지고 구르는 소리에 행여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하여 귀를 세우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산(山)은 녜ㅅ산(山)이로되 물은 녜ㅅ물 안이로다.
주야(晝夜)에 흘은이 녜ㅅ물리 이실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베치마 두른 채 한 많은 유람을 마치고 온갖 회포를 달래주는 정든 송도 땅을 찾으니 누구 하나 반겨줄 이 없는 슬픔이 밀려든다.
자연은 옛 그대로이나 자기와 사랑하던 임, 서경덕은 물과 같이 흘러갔으니 뇌리에 스치는 허전한 마음은 형언할 수조차 없다.
스승처럼 애인처럼 흠모해 오던 서화담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설움이 밀려와 지은 시조이다.

떠나간 임은 잊어야 하건만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줄 것을 스스로 마음속에 기약해 보는 체념 못할 집념이 넘치는 사랑의 심정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이사종(李士宗)과의 6년간의 계약결혼



황진이는 자신이 정복할 수 있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자신이 사랑을 바쳤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났다. 진이에게 있어서 첫 남자였던 부운거사 김경원이 그랬고, 서화담이 그랬으며, 양곡 소세양이 그랬다.

진이가 당대의 명창 이사종을 만난 것은 27세 때였다.
화담이 생전에 거쳐하던 서사정 초당을 찾아보고 오던 길에 마침 박연폭포와 송악산을 구경하고 오던 이사종을 만났다.
김경원, 서화담, 소세양처럼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별의 두려움이 오죽이나 컸으면 천하의 황진이도 아예 너무 깊은 정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사종과는 약속 하에 사랑을 속삭였다.
이사종에게서 3년, 황진이 집에서 3년 도합 6년간의 애정생활을 마치고 깨끗이 이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판 계약결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유감없이 정염을 불태웠던 이사종과 헤어진 황진이는 떠난 이사종이 그리워 삭풍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 긴긴 밤이면 이사종의 따뜻한 품을 그리는 마음에 그 옛날 부운거사 김경원을 사모하며 읊었던 시조를 새삼스레 떠올린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의 긴긴 밤'이라는 시간을 공간화 하여 내가 그리는 임이 오시는 날 그 긴긴 밤에 쌓이고 쌓였던 정을 풀겠다는 허전한 마음의 하소연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이 뜬구름처럼 사라져 버린 부운거사. 가을에 떠나 동짓달이 되어도 무심하니 낙엽처럼 쌓인 정을 잊지 못하고, 아랫목에 깔아 둔 이불 속에서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찾아주겠지 하는 수동적 사랑의 기다림이 섬세한 여성의 감정 속에 애절히 묻어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 속에 담긴 애증일심(愛憎一心)



別金慶元  별김경원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ㅣ  생각고 보고픈 마음 만날 길은 다만 꿈길 뿐
濃訪歡時歡訪濃   농방환시환방농  ㅣ  임을 찾아가 반겨할 땐 임은 나를 찾아오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ㅣ  원컨대 이후부터는 서로가 어긋나는 꿈길을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ㅣ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그립고 야속한 사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첫 남자인 부운거사를 아무리 기다려도 만나는 길은 꿈길 밖에 없는데 내가 당신을 꿈속에서 만날 때는 당신은 나를 찾아 꿈속을 헤맬 테니 언제나 서로가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기만 하지 않은가.
이 다음부터는 서로 같은 꿈을 꾸되 같은 시각에 꾸어서 찾아가는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오죽이나 좋겠냐는 것이다.
황진이의 부운거사에 대한 연연한 정이 아쉽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낙엽 지는 소리에 행여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하여 속으면서 부질없는 생각 말자고 고개를 저었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또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곤 했던 서화담과, 한편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외롭고 쓸쓸한 밤 혹여나 님이 오시나 하며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세우며 추야장장 긴긴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는 황진이. 이 두 사람은 서로 님이 오는가 보다 하고 기다리기만 하느라 만나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이 꽁꽁 숨겨놓은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에 비해 보면, 김경원을 그리는 황진이의 위의 시는 훨씬 적극성을 띄고 있다.

서로 각기 와주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시각에 반대 방향에서 같은 지점을 향하여 나아가서 중간에서 엇갈림이 없이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면….



登滿月臺懷古  등만월대회고

古寺簫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ㅣ  개울 곁 옛 절은 쓸쓸도 하네.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ㅣ  석양에 키 큰 나무 애를 끊노라

烟霧冷落殘僧夢   연무냉락잔승몽  ㅣ  남은 중 꿈속에 차가운 안개
歲月쟁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ㅣ  깨어진 탑머리에 세월 간 자취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ㅣ  봉황새 어디 가고 참새만 나니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ㅣ  진달래꽃 핀 곳에 염소를 치네.

神古憶得繁華夢   신고억득번화몽  ㅣ  호사롭던 그 옛날 그려 보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ㅣ  오늘 이리 쓸쓸할 줄 뉘 알았으랴.


부운거사와의 첫사랑의 홍역을 지독하게 치르고 난 진이는 부운거사와의 모든 추억을 떨쳐버리려고 어느 봄날 만월대에 올라 인생무상과 허무를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
꽃다운 젊음이 시들어 가도 아쉬워 할 그런 황진이가 아니지만 이 만월대 회고시야말로 인생 허무를 잘 표현하고 있다.



詠半月  영반월

誰斷崑崙玉   수단곤륜옥  ㅣ  곤륜산 옥을 그 누가 다듬어서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  ㅣ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던고.

牽牛一去後   견우일거후  ㅣ  그리운 견우님 떠나가신 뒤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ㅣ  서러워 허공중에 던져 버렸네.


이 시는 직녀의 옥절 같은 초승달을 쳐다보며 임을 생각하는 가련하고 요염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양곡 소세양과의 이별이 가까움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별의 슬픔을 초승달에 기탁하여 간접적으로 읊은 노래이다.
양곡 대감이 더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시이다.



奉別蘇判書世讓  소판서 세양을 이별하며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ㅣ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ㅣ  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구나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ㅣ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ㅣ  사람은 취하여 한 없이 마신다.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냉  ㅣ  차가운 물소리 거문고소리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ㅣ  매화향기 피리와 어울리는데

今日相別後   금일상별후  ㅣ  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   억군벽파장  ㅣ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에는 소세양과 천수원에서 놀던 그 사랑과 행복을 잊지 못하여 이제 떠나려는 소판서를 하루라도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 있다.
'오늘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로 끝맺은 진이의 정성에 소판서도 하룻밤을 더 머물면서 사랑을 불태웠었다.
가라는 말에 섭섭히 떠나는 임이 있는가 하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임도 있는 것이다.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서 사랑했던 이가 바로 소세양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소세양을 떠나보낸 뒤 남긴 시조 한 수.

 


어저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 다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정이란 그 대상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그리워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아아 내 일이여 그리워할 줄을 몰랐단 말인가.
있으라고만 붙잡았다면 굳이 버리고 갔을까마는
보내 놓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정을 나도 어인 일인지 모르겠구나.

몸부림을 치며 그리워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양곡 소세양이었다.
떠나는 양곡 대감을 말없이 보내 놓고 등잔불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독수공방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가슴 속에 듬뿍 담은 채 가련하고 애절한 여성의 한 많은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조이다.


풍류묵객들과 떠도는 명월의 방랑



당시 근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여자를 멀리 하며 명성 높은 황진이 소문을 듣고도 일소에 붙였다는 종실(宗室) 벽계수가 어느 날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 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가 이때 위의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풍류묵객들과 명산 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유랑도중 식량이 떨어지자 민가와 절에서 걸식하곤 했는데 이생은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하산 해버리고 말지만 홀로된 그녀는 걸식하거나 때론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하면서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을 전부 구경하고서야 송도로 돌아간다. 이러한 그녀의 성정에서 자연과 동화되고 싶어 할 만치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속속들이 함몰되기를 기원하는 황진이의 또 다른 모습 즉 구도자적 자세를 만나게 된다.

황진이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사랑했기 때문에 때로는 증오하게 되고 증오하기 때문에 반항하게 되는가 하면 곧 후회를 금치 못하는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의 심정과 행동을 분별 못하는 그런 사랑의 신비를 황진이는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존심이 증오심으로 증오심이 곧 후회를 낳게 되고 후회하는 까닭에 연민과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애증일심(愛憎一心)이 아닐까 한다.


황진이(黃眞伊)의 임종(臨終)과 백호(白湖) 임제(林悌)

그녀의 출생이 신비 속에 쌓여있듯이 그녀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으나 몇 군데 그녀의 유언에 관한 이야기가 성옹직소록에 보인다.

죽음을 앞둔 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후회도 원망도 없는 고요한 체념관이 가슴에 가득한 채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한 말은 일세의 명기다운 얘기이나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고 한 것을 보면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의 가혹한 자학의
채찍이기도 했다.

어쨌든 진이는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재질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그녀 한 인간으로서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여인이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진이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로는 나중 기생 한우의 가슴 속에 평생토록 연모의 정을 심어 주었던 자유 활달한 호남아요 당대의 한량이었던 백호 임제가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황진이를 찾았는데 이미 고인이 된 뒤라 백호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뭇�는다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하며 노래했고, 그렇게 사모하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한 번 죽으면 잡초가 우거진 무덤에 백골만 묻혔는가 하는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는 애끓는 심정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으니 생전에 명성을 떨쳐 세인의 심금을 울리던 사람도 죽음이 가련하다는 허무감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하고 말았으며 이 후 사색당쟁의 벼슬길을 스스로 버리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평소 인연이 되지 않았지만 사모하였던 여류 시인의 무덤에 술 한잔 올렸다는 사연으로 관직을 떠나 사림에 묻히게 된 표상이 고금을 두고 짙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있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 <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 <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사진은 KBS 드라마 황진이의 주인공인 하지원

출처 : 산그늘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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