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저 겨울산에 나를/시. 김승영

2006. 2. 10. 19:30나의 글

 

저 웅크린 겨울 산에
나를 묻고 싶다

 

내 가녀린 영혼을 여위게 하던
창백한 너를 두고 가는 날은
산처럼 무거운 가슴을
하늘에 토해 내리라

 

마른 가지 위에 언 눈이
녹아 내리는 어느 봄날에
너는 소생하여라
쌓인 눈이
내 마음 서러운 눈물처럼
녹아 내리는 어느 날엔가
너는 새 잎으로 돋아나라

 

겨울 산에 묻혀
네가 사랑이라고 말한 것과
네가 아픔이라고 말한 것과
내가 눈물이라고 말한 것과
내가 다시 절망이라고 한 것들이
어느 숲속에서 잡초로 자라
바람에 흔들리는지
먼 날까지 가슴 저리게 보리라

 

아지랑이 들녘에 피어오르는
햇살 속에서
너는 새초롬히 반짝이어라
너의 고은 손으로 장식해준
꽃상여에 누어
이제사 가슴에찬 평화를 안고
겨울 산에 묻히고 싶다
멍들고 찢기며 내 달리던
슬픈 눈망울에서
한 목숨 홀로 베어내던
고통이던걸 잊기 위하여
다시 오열하리라

 

저 공허의 겨울 산에 묻히고 싶다
먼 옛날 아득한 날에
우리가 나눈 빛 더미에서
이슬처럼 떨어져 내리던
꿈의 조각들은
순백의 염원으로 망연한 마음을 묻고
어느 전설처럼이나
긴 세월을 한으로 노래하리라

 

버들꽃 달빛에 젖는 어느 봄밤에
너는
옥피리 불며 춤을 추어라

 

찢어진 깃발을 생존처럼 펄럭이며
가슴 언저리 아프게 꽂히는
빗줄기 속을 잡은 손이 시리던
그 자리에도
언 눈은 쌓였을 텐데
너의 기도를 부여잡고

저 찬 겨울 산에 묻히고 싶다 
빈 잔처럼 공허한 후회를
쓴 풀잎처럼 씹으며 자주 나를 죽이곤 했지
화사한 어느 봄날에 너는
깊은 수령을 기어 나와
자줏빛 새옷을 갈아입고
봄 나드릴 하여라

 

헛된 염원의 노래는
언제나 고뇌의 곡으로 떨렸으며
침전하며 소멸하였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아낸 것들은
아직 나의 밤을 불면으로
시달리게 한다.
차갑게 차갑게 바람이 분다
짐스런 목숨을
저 웅크린 겨울 산에 묻고 싶다

 

언 눈 녹아 내리는 어느 봄날에
너는 고운 꽃으로 다시 피어나
바람을 노래하여라
산을 노래하여라

 


 

출처 : 저 겨울산에 나를/시. 김승영
글쓴이 : 먼 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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