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788.02.22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출생

2012. 3. 4. 23:28좋은글

1788.02.22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출생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9790

 

 

 

 

"정신에 있어 의지력이란 눈뜬 절름발이를 어깨에 태우고 가는 힘센 장님과도 같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1788년 2월22일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서가 단치히(지금은 폴란드의 그다니스크)에서 태어났다.

1860년 몰(歿).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낸 '데칸쇼'라는 말이 드러내듯 쇼펜하우어는 데카르트, 칸트와 함께 서양 철학 도입기의 일본과 한국에서 대학교 철학과의분위기를 상징했던 인물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상표는 염세주의다.

그 염세주의가 이 철학자에게 생래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교계의 큰손이었던 어머니와의 불화나 베를린 대학 최고의 인기 교수 헤겔에 대한질투 등으로 이 철학자가 입은 심리적 상처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이 염세주의 철학자는 은행가 아버지 덕분에 돈 걱정은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고, 자살하지도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다. 그는 이 책에서 시간과 공간을 그 형식으로 하는 이 세계는 진정한 실재(物自體)가아니라 단순한 주관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뒤에서 세계를 있게 하는 실재는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다. 삶은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모든 욕망을 떠나 예술적 관상(觀想)에 몰입하거나, 더 나아가 금욕적인 '의지 부정'으로 자아의 속박을 떠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열반이 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삶의출구였다.

요즘 독자들에게 쇼펜하우어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의 저자로유명하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그는 논리학과 구별되는 토론술의 수립을 목표로 논쟁의 요령들을 나열하고 해설하고 있다. 예컨대 "의미없는 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 상대방이 놀라 얼이 빠지도록 하라"(요령36).

고종석 편집위원 /한국일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

1788. 2. 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1860. 9. 21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독일의 철학자.

 

 

흔히 '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린다. 무엇보다도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로 중요하다. 그의 글은 나중에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영향을 끼쳤다.

 

초기생애와 교육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상인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와 나중에 소설·수필·기행문 등을 써서 유명해진 요하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 지배 아래로 들어가자 가족과 함께 함부르크 자유도시로 이사했다. 쇼펜하우어는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후 사립직업학교에 들어가서 계몽주의 정신을 익혔고 인간의 서약에 민감한 경건파적 태도를 접했다. 1803년에는 부모와 함께 1년 동안 벨기에·영국·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했다. 1805년 4월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그의 삶은 결정적인 변화를 맞았다. 어머니와 여동생 아델레는 바이마르로 이사했으며 어머니는 그곳에서 시인 J. W. 폰 괴테와 독일의 볼테르라 불리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의 사교 모임에 들어갔다. 쇼펜하우어는 1년 남짓 함부르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덕분에 예술과 과학에 몰두할 자유를 좀더 얻을 수 있었다. 1807년 5월 마침내 함부르크를 떠났고 그후 2년 남짓 고타와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대학 입학에 필요한 학과 공부를 했다. 1809년 가을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주로 자연과학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겨우 2학기 만에 인문학부로 옮겨 우선 플라톤과 이마누엘 칸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1811~13년 베를린대학교를 다녔고 여기서 J. G. 피히테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들었으나 별다른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1813년 여름 동안에 루돌슈타트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여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숙기 활동

그해 겨울(1813~14)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괴테와 함께 여러 가지 철학적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 같은 시기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제자인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는 그에게 고대 인도의 가르침들(베단타 철학과 베다의 신비주의)에 관해 알려주었다. 뒷날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 Upaniṣads〉(베다 경전의 일부로 철학서)가 플라톤 및 칸트와 더불어 자신의 철학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인도철학). 1814년 5월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어머니의 경박스런 생활방식 때문에 어머니와 다툰 후 사랑하던 바이마르를 떠났다. 그후 1818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살면서, 때때로 〈드레스데너 아벤트차이퉁 Dresdener Abendzeitung〉의 필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아이작 뉴턴에 반대하고 괴테를 지지하는 논문 〈시각과 색에 관하여 Über das Sehn und die Farben〉(1816)를 완성했다.

 

그후 3년 내내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를 준비하고 저술했다. 이 책의 기본 사상(이는 제목 자체에 축약되어 있음)은 포괄적인 두 계열의 반성으로 이루어진 4권의 책 속에 전개되어 있는데, 이 반성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

 

제1권은 칸트로 시작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세계는 공간·시간·인과성 같은 지성의 구성물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성물들은 이 세계를 현상으로서, 즉 공간·시간 면에서 병렬·연속된 다수의 사물로서만 보여줄 뿐 칸트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자체로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제2권은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에 관한 고찰로 나아간다. 세계의 만물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인간에게 2가지 방식으로 떠오른다. 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몸 또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 내적으로는 만물의 첫째 가는 본질의 일부, 즉 의지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심신이원론). 의지는 물자체이다. 즉 그것은 단일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원인도 목적도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현실화의 상승 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무기적 자연의 힘 속에 있는 맹목적인 충동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자연(식물과 동물)을 거쳐 합리성에 따르는 인간 행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욕망·선동·충돌의 거대한 사슬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슬은 높은 형태가 낮은 형태를 상대로 해서 벌이는 계속적인 싸움, 목표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영원한 열망이며 비참·불행과 뗄래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비난으로서, 각 개인에게 '이제 충분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1·2권이 의지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반면, 미학과 윤리학을 다루는 제 3·4권은 의지의 부정이 해방가능성임을 지적함으로써 앞의 2권을 넘어선다. 이같은 부정을 보여주는 천재와 성인을 이 책의 주인공으로 불러옴으로써 이 책은 비존재가 존재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열정이 더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의지 없는 사물관을 요구한다(→ 예술철학). 여러 수준의 예술은 의지 실현의 수준과 대응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예술은 건축학이며 그 다음은 시 예술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은 음악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으로만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인간학과 사회학은 헤겔과는 달리 국가나 공동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환자, 홀로 힘써 일하는 고통받는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지키면서 남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사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그의 철학에는 더이상 아무런 발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떠한 내적 고투나 변화도 없었고 기본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재검토도 없었다. 이 책 이후의 저술들은 그저 좀더 상세한 설명, 명료화, 확인의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장기간에 걸친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헤겔과의 논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후인 1820년 3월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24학기 동안 교수로 재직했지만 강의라고 할 만한 것은 첫 강의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강의 시간을, 많은 학생이 듣고 있고 게다가 수강생이 점점 더 늘고 있던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게 잡았기 때문이고 또 그 시간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가 끊임없이 진보하는 철학에 도전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의 책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에 걸친 2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으며, 그뒤 뮌헨에서 1년 동안 병을 앓았다. 1825년 5월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의를 시도해보았으나 실패했다. 그후 주로 번역을 하면서 이차적인 일들에만 몰두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학문적 은둔

그후 28년 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는데, 그곳이 콜레라의 위험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외에는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연구(특히 자연과학)와 집필에 몰두한 채 은둔생활을 했다. 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즈음 그의 삶은 하루하루 똑같이 정해진 생활, 칸트를 모범으로 삼은 금욕주의적인 생활양식,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 몸짓이 많이 섞인 독백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은둔기를 한가롭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1836년에는 19년에 걸친 '말없는 분노' 끝에 〈자연 속의 의지에 관하여 Über den Willen in der Natur〉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의문점과 발견들을 자신의 의지 이론의 지지 근거로 능숙하게 사용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협잡꾼' 헤겔과 그 도당에 대한 신랄한 독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외 에세이도 몇 편 발표했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재판(1844)에는 1권이 더 추가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멍청한 세상 사람들의 저항'이라 불렀던 것을 깨부술 수는 없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그다지 무게를 갖고 있지 못했음은 3명의 출판인이 그의 후기 저술들을 거절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결국 베를린의 한 이름없는 서적상이 고료 없이 원고를 받아들였다.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시발점이 된 이 책에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저술의 틀 안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에세이와 주석들을 모아 〈소품과 단편집 Parerga und Paralipomena〉(1851)이라는 제목을 단 2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소품〉에는 철학사와 관련된 단편들이 실려 있다. 가령 〈대학 철학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논문과, 심오하고 수수께끼 같은 〈개별자의 운명에서 직관적 의도에 관한 초험적 사변〉·〈영시(靈視) 및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시론〉(초심리학에 관한 최초의 탐구, 분류, 비판적 반성)·〈삶의 지혜에 관한 격언〉 등은 그의 오랜 삶을 통해 얻은 선명하고 빛나는 설명들이다. 〈단편집〉, 또는 쇼펜하우어가 부르는 대로 하자면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별개의, 하지만 질서가 잡힌 사상들"에는 글쓰기와 문체, 여성, 교육, 소음과 소리를 비롯한 수많은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이 실려 있다.

 

생애 말년에는 그의 저작 대부분에 마무리 손질을 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자신있는 서문을 달고 1859년에 나왔고, 1860년에는 〈윤리학 Ethics〉 재판이 나왔다. 쇼펜하우어가 갑작스럽게 고통 없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테트가 많은 수고(手稿)를 담고 있는 〈소품과 단편집〉의 증보신판(1862)을 비롯해 〈4가지 근원에 관하여〉(1864)·〈자연 속의 의지에 관하여〉(1867)·색깔에 관한 논문(1870)·〈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4판, 1873)를 냈다. 1873년말 프라우엔슈테트는 쇼펜하우어의 첫번째 전집을 6권으로 출간했다.

 

영향

이 기간에 쇼펜하우어의 실제적인 영향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정신과 이성이 아니라 직관력·창조력·비합리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니체를 거쳐 물활론·생철학·실존철학·인간학 등에 영향을 끼쳤다. 제자 율리우스 반젠과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무의식 철학을 매개로 할 경우에, 쇼펜하우어는 현대 심리학과 지크문트 프로이트 및 그 학파와도 연결될 수 있다. 스위스 문화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철학 역시 쇼펜하우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 문화권에서 쇼펜하우어가 음악과 문학에 끼친 영향은 리하르트 바그너, 한스 피츠너, 빌헬름 부슈,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프랑크 베데킨트, 토마스 만과 같은 여러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쇼펜하우어 학회는 1911년부터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제시·보급하는 데 전념해왔다.

 

A. Hübscher 글

 

/네이트 백과사전

 

 

 

의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에서 시작된 ‘지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칸트에 의해 철학적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촉발한다. 즉 지식의 근원은 경험이지만 경험 자체가 지식은 아니며, 경험이라는 재료가 인간의 선험적 개념들(a priori concepts)에 의해 조직된 것이 지식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칸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우리 인간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단지 사물의 외양인 현상(phenomenon)에 지나지 않으며, 이른바 ‘물자체(Ding an sich)’는 결코 인간의 인식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접근할 수 없는 물자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현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쓸 때 보이는 방안의 시계와 같은 사물은 물론 매일 같이 지내는 가족조차도 우리는 그 실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현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일단 상식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주장이다. 우리에게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그의 명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칸트의 이 부자연스러운 인식론을 뒤집으려고 시도하였다.

 

 

 

 

“모든 진리는 인정받기 전에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째 조롱 받으며, 둘째 반대에 부딪히고, 셋째 자명한 것으로 간주된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 지금 폴란드에 속해 그단스크(Gdańsk)로 불리는 오래된 도시 단치히(Danzig)에서 태어났다. 한자동맹에 속해 있던 자유도시 단치히가 프러시아에 합병되자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함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국제무역에서 성공한 상인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의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이점은 쇼펜하우어의 이름 ‘Arthur’가 독일, 영국, 프랑스어에서 같은 철자로 쓰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80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자살인 듯) 쇼펜하우어는 2년간 더 함부르크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괴테와 친분이 있었던 문필가 어머니는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문학살롱을 열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죽음을 순식간에 잊고 사교계로 진출한 어머니와는 서로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고 혹평하는 등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09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813년 예나 대학에 논문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를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814년부터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쇼펜하우어는 학위논문을 확장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9년 약관 31살에 출판을 하였다. 1820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 자리를 얻은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인기강의시간에 맞추어 자신의 강의를 개설하였으나,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불과 5명만이 수강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쇼펜하우어가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헤겔의 명성에 그의 철학교수로의 행로는 처음부터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1825년 베를린 대학에서 다시 한 번 강의를 시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831년 콜레라 유행을 피해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한 쇼펜하우어는 생전에 다시 대학 강단에 서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곳: 그단스크로 불리는 단치히.
<출처 : Wikipedia>

 

 

 

 

 

“칸트의 철학을 철저히 공부하는 것이 이 강의를 듣기 위한 유일한 전제이다. 독자가 이외에도 신과 같은 플라톤을 학교에서 배웠다면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더욱더 준비되고 예민해 질 것이다. 여기에 추가하여 독자가 베다(Veda)경전을 읽는 축복을 받았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

쇼펜하우어는 물자체와 현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칸트를 비판하였다. 우선 이 양자가 ‘원인-결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 칸트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인과관계란 경험세계 속의 사건들 간의 관계이므로, 경험 저편에 있다고 가정되는 물자체는 결코 그 어떤 것과도 인과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대상들의 법칙성을 혼동하는 문제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이미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피히테와 헤겔 등의 독일관념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지적한 바가 있었다. 둘째, 칸트가 우리의 인식능력이 접근할 수 없다고 본 물자체가 실은 결코 인식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관찰은 이론적 작업에만 몰두하는 철학자들이 범하는 흔한 오류, 즉 인간의 인식이란 항상 숙고된 것이라는 착각을 비판하면서 시작된다. 약 한 세기 후에 등장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모습(Ludwig Sigismund Ru
hl가 1815년에 그린 쇼펜하우어 초상화).
<출처 : Wikipedia>


나는 동물 하나를 보고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너는 뭘 보고 있니?” 나는 대답하기를: “토끼.” -나는 풍경을 보고 있다; 별안간 토끼 한 마리가 뛰어가고 있다. 나는 “토끼!”라고 외친다. 보고(Meldung)와 외침(Ausruf) 모두 지각과 시각체험의 표현이다. 그러나 외침은 보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렇다. 외침은 우리로부터 빠져 나간다. - 그것은 마치 비명이 고통에 대하여 갖는 관계와 흡사하다. ([철학적 탐구], 2부 §138)

여기서 보고는 관찰자가 숙고 끝에 내린 인식결과이지만, 외침은 그런 숙고 없이 즉각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내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는 문장이 문법적으로는 옳지만 내용적으로는 틀리다고 생각한다. 누가 바늘로 나를 찌르면 나는 ‘아야!’하고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나는 내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는 등의 ‘괴상한’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타인의 비명이나 찡그린 얼굴표정을 보고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위의 ‘토끼!’의 예에서 외침이 우리 몸에 대해 갖는 관계는 비명이 고통에 대해 갖는 관계와 흡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외침과 몸, 비명과 고통은 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외침의 경우 어떤 물체를 지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패턴매칭), ‘토끼.’라고 발화하는 3단계의 인식행위가 아니라, 지각으로부터 외침까지 전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행위를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외과수술의가 환자를 보듯 제3자의 입장에서 인식할 수도 있지만, 1인칭 시점에서 즉 내적 지각을 통해서 접근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욕망과 집착, 기대 등을 통해 나의 몸을 움직이며, 이런 행위 후에 나를 돌이켜 보았을 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른 무엇이 있음을 짐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나를 직접 행동으로 몰아넣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 전부를 통칭하여 ‘나의 의지’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 내가 지각을 통해서 숙고 끝에 내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모두 ‘…으로 보다(see as…)’의 형태를 갖는다. 이때 무엇을 ‘…으로’ 보기 위해서는 항상 일종의 패턴(pattern),  관념(idea), 혹은 표상(representation)이 필요하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제3자 시각에서 얻어진 현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외침이나 쇼펜하우어가 맹목적이라고 본 의지의 작용과는 구별된다. 그렇다면 내가 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의지는 더 이상 표상의 세계, 즉 현상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는 바로 물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쇼펜하우어의 책 제목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이점, 즉 의지라는 물자체의 세계와 표상이라는 현상의 세계를 모두 이야기하여야만 정상이라는 점을 칸트의 인식론과 대비시켜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몸을 움직이는 추동체로서 의지를 물자체로 확인하였다면, 이점은 곧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타인과 인간 이외의 모든 감정 있는 동물에게로 확산될 수 있다. 이 모든 동물에게서 공통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Wille zum Leben)’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지를 통해 움직이는 존재의 단위를 점차 확대한다면, 개인에서 국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계에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세계의 의지(Wille)는 이 세계의 물자체로서 모든 세계의 움직임은 바로 이 의지의 표현이 된다. 쇼펜하우어 본인이 여러 번 강조하였듯이 이 세계의 유일한 실체로서 브라만(Brahman)을 상정하는 고대인도의 사상과 그의 철학의 유사성은 이제 매우 분명하다.

 

 

 

쇼펜하우어의 세계존재구조.

 

 

 

 

 

“마음에 대한 의지의 힘은 건장하지만 눈먼 사람이 앞을 볼 수 있지만 마비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삶을 욕망하고 기대하고 집착하는 의지는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맹목적이다. 따라서 맹목적 의지에 휘둘리는 인간의 삶 역시 맹목적이며 따라서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목적이 없고 무의미한 쾌락 추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욕구는 필요로부터 즉 결핍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이 충족되면 욕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충족된 욕구가 한가지라면 적어도 열 가지는 거부된 채로 남아 있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고 욕구는 한이 없으며 충족은 잠깐이고 그나마도 부족하게 채워지기가 일쑤이다. (…) 그것은 마치 오늘을 연명시켜 삶의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시키는 거지에게 베푼 자선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4장)

따라서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삶의 고통을 덜어내는 길이다. 쇼펜하우어가 인도나 초기기독교의 금욕주의에 경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상과 불교와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즉 불교의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四聖諦)를 따르자면,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생기고, 고통의 원인은 소멸될 수 있으며, 고통을 소멸하는 길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대한 친근감과 그의 철학과의 유사성을 인정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이점을 밝히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보는 고통의 원인은 무명(無明)으로서 무명이란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라는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구조를 지니고 있어, 실제로 고통을 벗어나기 전에는 무명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다만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점은 의지, 즉 욕구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본 쇼펜하우어의 직설적인 분석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나 삶의 고통을 철학적 주제로 선택한 쇼펜하우어의 용기와 정직성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주위에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세계의 고통과 혼돈, 열정, 악에 대하여 이야기한 첫 번째 철학자이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철학자는 보지 못한 듯하며, 그들은 항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조화만을 이야기 하여 왔다. 드디어 여기에 우주의 근저에는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한 명 있다.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성찰])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예술이나 심리학의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의지의 욕구로부터 벗어나 사물의 이데아를 정관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예술작품의 창작과 향수에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록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구름 사이로 잠깐 햇살이 비추듯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순간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가 정언명령의 화신 칸트에 대해 독설을 퍼부으며 계몽주의를 비판한 니체에게 영향을 끼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삶의 고통을 철학적 주제로 삼았던 철학자, 쇼펜하우어.
<출처 : Wikipedia>

 

 

 

 

홍성기 /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과 석사, 자르란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철학], [시간과 경계], [고전 논리학과 대화 논리학]이 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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