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당나귀

2010. 4. 7. 22:59좋은 시

 
개진개진 젖은 눈의, 고마운 고집쟁이
'무거운 짐진 자' 당나귀 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이혜승 <tangolee@hotmail.com>
          
▲ 이집트, 룩소르  ⓒ 이혜승

당나귀(Ass): 당나라에서 전해져 당나귀다. (당면, 당먹, 당닭, 당사 등도 모두 중국에서 전래된 것)

학명 : 에쿠우스 아시누스(Equus asinus)

분류 : 말과의 포유류 동물

분포 : 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유럽·러시아·미국 등 극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세계 전 지역에 분포한다.

역사 : 야생 당나귀(아프리카, 아시아)와 가축화된 당나귀가 있으며 가축화된 당나귀의 원류는 아프리카 야생 당나귀로 보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유랑민족인 셈족이 많이 사용했고, 아라비아, 인도, 페르시아 등 중동, 서남 아시아에서 주로 운반용으로 쓰였다. 로마인들에 의해 중부 유럽에 널리 분포되었고 현재는 프랑스에서 당나귀 개량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사전 참조)


외모 : 큰 귀와 선하게 보이는 큰 눈이 특징적이다. 키는 80-150cm 가량으로 몸집이 작으나 체구에 비해 힘이 세고 인내력이 강하다. 풀, 볏짚 등 아무거나 잘 먹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질병도 잘 앓지 않는다.

성격 : 온순하면서도 사교성이 뛰어나며 영리하지만 한 고집 한다. 예민해서 낯선 사람들이 오면 시끄럽게 소리를 내 문지기 노릇을 톡톡히 한다.

경력 : 독특하고 민중적인 캐릭터 덕분에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민담, 구전 설화, 우화, 동화, 만화, 속담 등의 주연, 조연으로 출연해왔다. 흔히 어리석은 형상, 비아냥거림의 대상, 악한 행위에 대한 형벌로 묘사되는 일이 잦다.

잘 알려진 우화 중 짐을 잔뜩 실은 당나귀가 꾀를 부려 강물을 건널 때 옆으로 넘어져 짐을 덜었으나 이후 주인이 솜을 싣는 바람에 더욱 큰 짐을 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못된 짓을 일삼던 피노키오는 당나귀로 변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리지아의 왕 마이다스는 목동의 신 팬과 아폴로 신의 음악 시합을 구경하게 되었다. 심판 트몰루스가 아폴로 신의 손을 들어준 데 반해 마이다스는 팬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아폴로신의 미움을 사 두 귀가 당나귀처럼 늘어나 버렸다.

비록 마이다스가 황금의 손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마이다스의 귀를 가진’ (Midas-eared)이라는 표현이 판단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위의 사건에서 유래한다.

왕족 신분과 당나귀 귀의 결합은 신라때부터 전해지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에서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인 경문왕이 실제 당나귀 귀를 가졌는지 여부를 DNA 등의 조사를 통하여 밝혀내려는 시도는 아직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경문왕의 정적이 퍼뜨린 소문이거나 왕의 강압 정치를 비꼰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문왕, 조범환, 푸른역사, 2005)

또한 다음의 속담들은 당나귀가 오랫동안 조롱받는 캐릭터 역할을 맡아왔음을 보여준다.

‘당나귀 귀 치레’ : 필요도 없는 곳에 쓸데없이 너무 꾸민다

‘당나귀 못된 것은 샌님만 업신여긴다’ : 훌륭하지도 못한 자가 도리어 윗사람을 우습게 여길 때 쓰는 말.

‘당나귀 하품한다’ : 당나귀 우는 것을 하품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니, 귀머거리를 비웃어 하는 말.

‘뜨물 먹은 당나귀 청’ : 텁텁하여 듣기 좋지 않은 목소리를 조롱하는 말.


인류에게 대단히 중요한 운송, 교통 수단 노릇을 해 왔던 당나귀의 처지에서 볼때 위의 비유는 억울한 면이 있다. 죽도록 고생하고도 욕은 욕대로 먹으니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당나귀가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만은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로 원정을 갈 때는 낙타 5천 마리와 함께 당나귀 1만 마리를 대동했을 만큼 당나귀는 문명사의 한 페이지에 증인으로 등장한다.

그뿐인가. 당나귀는 하늘에서 빛을 발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당나귀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소유였다. 그런데 신이 거인족과 싸울 때 당나귀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큰 소리로 울어 거인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4,5등급의 어두운 별자리인 게자리 가운데 가장 밝은 별인 델타 별은 당나귀 별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별이 흐리면 비가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들은 당나귀가 하늘에서 배고프지 않도록 여물통을 프레세페 성단으로 만드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고집이 세고 성질을 부리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순박하고 우직한 데가 있어서 당나귀는 늘 평민들과 가깝게 지내왔다. 할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 타는 동물은 역시 당나귀다.

철학자들에게도 당나귀는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중동의 바보 성자 물라 나스루딘은 세상 살이의 부조리와 어리석음을 해학적으로 풍자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후 돈키호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당나귀는 그의 삶의 동반자였고 또 이야기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물라, 큰일났네. 자네 당나귀가 없어졌어.”

그 말을 듣고도 나스루딘은 여전히 태연한 채 콧노래를 불렀다.

“유일한 재산인 당나귀가 사라졌다는데 뭐가 그리 좋은가?”

나스루딘의 대답. “만약 내가 당나귀에 타고 있었다면 나도 잃어버렸을게 아닌가.”


나스루딘은 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당나귀가 세계의 중심이며 세계의 별은 당나귀 털의 숫자와 같고 인간의 지각 수단은 당나귀 꼬리털의 숫자와 같다고 말했다. 당나귀의 존재론적 지위가 나스루딘의 일화에서만큼 높아진(!)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학과 회화 장르에서도 당나귀는 자주 출현했던 캐릭터였다.

그리고 당나귀는 평화로운 전원 마을의 겨울 풍경에도,
( 누나랑 등불 켜서 외양간에 가보니 당나귀 소록 소록 한잠 들었네. 두 귀도 소오록 한잠 들었네 – 박목월, ‘눈과 당나귀’),
존재의 고독감 속에도,
( 살고 싶은 죄밖엔 없습니다/이렇게 저렇게 살고 있는 죄밖엔 없습니다/외로움이 죄라면 하는 수 없이 죄인이올시다 – 조병화 '당나귀' ),
사랑하는 여인과의 로맨틱한 해후에도,
(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꽤나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나귀의 캐릭터는 역사적으로, 공간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잊지 못할 당나귀 형상으로는 아마도 올해 80살을 맞은 '곰돌이 푸'의 등장 인물, 아니 동물 당나귀 이요르와 슈렉의 덩키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이요르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곰돌이 푸 및 피글렛, 토끼 등과 함께 훈훈하고 따뜻한 감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애니매이션 슈렉은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빠져들만한 매력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바로 캐스팅이다. 막무가내로 수다를 떨고 그 때문에 위기에 빠지기도 하며 용과 사랑에 빠지는 배역에 덩키 이상 적합한 캐릭터가 또 누가 있을까.

슈렉의 상영 이후 일부 국가에서는 애완용 당나귀 구입 열풍이 불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당나귀를 잘 돌봐주지 않는 등 사후 관리의 허점이 드러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프랑스의 클레어 벨튼은 ’새 유럽의 고통받는 당나귀를 위한 계획’을 운영하는데 자신이 기르는 당나귀들의 후원자를 모집한다면서 “직접 기르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언제든 와서 당나귀를 만나고 쓰다듬어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2005년 2월 24일 연합뉴스)

최근에는 다른 각도에서도 당나귀에 대해 뜨거운 관심이 쏠린다. 운반용으로만 쓰던 당나귀를 식용으로 개발한 것. 사실 예부터 날개 달린 짐승으로는 기러기 고기가 가장 맛있고 네발 달린 짐승 중에는 당나귀 고기가 가장 맛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누가 쇠고기를 사주면 그냥 먹어라.돼지고기을 누가 사쥐도 먹지 말아라. 당나귀 고기는 반드시 돈을 주고 사먹어라'는 속담도 전해진다. 또 중국의 음식에서 파생된 이야기 중에 하늘에는 용이고 땅에는 당나귀란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당나귀 고기의 맛과 영양이 우수함을 일컫는다.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은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를 준다. 남성 발기부전, 골다공증, 고혈압, 골수염 등에 효과가 있고 영양이 풍부해서 약재로 썼을 뿐만 아니라 모든 풍을 막아주고. 여성월경 불순을 치료 하며 자양강장 식품으로 특히 정력에 으뜸(한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대목!!!) 이라고 본초강목은 기록한다.

이와 같은 자료에 근거하여 충청도의 ‘한울소(하늘에서 내린 소 라는 뜻. 당나귀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는데, 당나귀의 정체성이 흐릿해진 면이 없지 않다) '참사랑 영농조합’이란 곳은 앞으로는 당나귀 고기 프랜차이즈, 당나귀 체험 타운 등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리석음의 상징에서 하늘의 별로 등극하고 임금님들의 귀가 되기도 하고 또 전세계 어린이들의 친구이기도 한 당나귀. 이젠 웰빙 음식으로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자니 당나귀의 삶도 변화 무쌍하다.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요즘 말로 안습 – 안구에 습기차다)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버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끓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이효석, 메밀꽃 필무렵)


메밀꽃 필무렵의 볼품없는 나귀는 이 십년 간 허생원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왔다. 허생원이 가장 어려운 시절에도 수십 년 쌓인 정분을 돈과 바꾸지 않았던 유일한 동반자였다. 당나귀는 수명이 30-40년이라 긴 편이고 힘이 세며 높고 낮은 언덕이나 강물을 건너는 데도 적합한 동물이다.

그래서 예부터 당나귀는 여행 파트너로 인기가 높았던 듯 하다. ‘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은 암당나귀와 함께 프랑스의 남부 지방 세벤느를 여행했고(‘당나귀와 떠나는 여행’), 물라 나스루딘에게도 당나귀는 거의 분신과도 같았다.

하지만, 당나귀가 맡았던 여러 역할 가운데서 아마도 당나귀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할 캐릭터는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했던 개진개진 젖은 눈의, 주인과 함께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형상이 아닐까 싶다.